일면식도 없던 수험생 사이에서 벌어진 ‘묻지마 범행’이었다. 지난해 8월30일 오후 5시40분께. 서울 강남구의 대형학원에 다니던 재수생 A군이 수업을 마치고 학원에서 운영하는 독서실로 향했다. 그는 500㎖ 페트병에 담긴 2000원짜리 블랙커피를 사 들고 갔다. 수능이 2개월가량 남은 시점이었다.

당시 독서실엔 같은 학원 수강생인 B양도 있었다. 둘은 서로 전혀 모르던 사이였다. A군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B양은 A군의 책상에 놓인 커피병을 발견했다. B양은 갖고 있던 변비약 2알을 커피병에 집어넣었다. ‘취침 전 충분한 양의 물과 함께 복용하고, 섬유소가 풍부한 음식을 많이 섭취할 것’이 권장되는 약이었다. 돌아온 A군은 아무 의심 없이 커피를 마셨고, 결국 설사에 시달리다 장염까지 걸렸다.

사건 직후 A군은 수사기관에 철저한 조사와 강력한 처벌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2차 가해가 두려우니,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알 수 없게 해달라. 수능을 앞둔 수험생이라서 더는 정신적, 시간적 피해를 받고 싶지 않다”며 “이후 모든 연락은 보호자를 통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검찰은 “아무 이유 없는 장난으로 피해자를 다치게 했고, 변비약으로 피해자의 커피를 오염시켰다”며 B양에게 상해와 재물손괴 혐의를 적용해 약식기소했다. 검찰이 정식 재판 대신 서면 심리만으로 벌금·과태료 부과를 청구하는 것을 약식기소라고 한다.

법원은 지난 4월 벌금 200만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불복한 B양은 정식 재판을 받겠다고 했다. 재판 과정에서 B양은 “잘못을 인정한다.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반성 중”이라고 호소했다. B양의 가족도 선처를 탄원했다. 반면 검사는 약식명령과 같은 벌금형을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17단독 김한철 판사는 지난 9일 약식명령처럼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김 판사는 “피고인이 초범이고 각 범행을 모두 자백하는 점 등을 고려한다고 해도, 약식명령에서 정한 형 및 검사의 의견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다만 피고인이 정식 재판 청구 이후 피해자를 위해 200만원을 공탁한 점을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한다”고 말했다. 형사공탁은 피해자와 합의하지 못한 피고인이 법원에 공탁금을 맡기는 제도다. 피해자가 공탁금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피고인이 합의할 의사가 있었다는 점이 표시된 만큼 형량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김 판사는 이 사건과 관련해 “수능을 앞두고 저지른 이른바 묻지마 범행으로, 죄질이 나쁘다. 피고인이 주장하는 사정들도 의미가 없어 보인다”며 “피해자는 수능이 끝나고 수사기관에 진술서를 내고 ‘재수에 실패했다’고 밝혔다. 피고인은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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