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가 독립군의 획기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는 수적 열세인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봉오동전투는 중국 지린성 화룡현 봉오동에서는 독립군과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 간에 벌어진 전투다. 당시 만주에는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집결해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6월 4일 홍범도와 최진동의 독립군은 두만강을 도강해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국경초소를 기습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일본군 1개 소대가 격파됐다. 그러자 일본군 19사단장은 1개 대대 병력을 삼둔자로 출동시켜 한인들을 살해했다. 이에 독립군은 반격을 가해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6일 일본군은 제19사단에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해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공격에 나섰다. 이틀 전 삼둔자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지만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 산지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포위해 궤멸시켰다.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상해임시정부 군무부 발표에 따르면,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 측은 공식 발표에서 전사 1명, 부상 2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 측의 의도적인 조작으로 보인다는 것이 학계의 입장이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상대해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이 전투는 이후 만주에서 일어나는 독립군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봉오동전투 이후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는 급격히 증가했고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 작전을 진행했다. 자신감을 얻은 독립군은 같은 해 10월 청산리 대첩에서도 큰 승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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