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된 ‘2004년에서 2024년으로: 밀양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삶에서, 피해자의 눈으로,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간담회.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2024년 6월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된 ‘2004년에서 2024년으로: 밀양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삶에서, 피해자의 눈으로,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간담회.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지난 2004년, 밀양 성폭력 사건을 경찰에 신고했던 피해자측 보호자는 며칠이 지나 상담사를 찾았다. 경찰에 ‘비밀유지와 언론 비공개’를 요청해 약속 받았으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사가 시작된 지 2주도 지나지 않아 피해자 이름과 나이, 거주지까지 적힌 보도자료가 배포됐다. 언론사들은 경쟁하듯 무분별한 보도를 이어갔다.

그리고 2024년, 유튜버 ‘나락보관소’가 성폭력 가해자들의 신상공개 영상을 올려 사건이 재점화됐다. 언론은 당사자 동의 없이 유튜브에 공개된 피해자의 목소리, 상세한 피해 내용이 담긴 판결문, 가해자의 신상 등을 그대로 다시 기사화하며 이슈를 키웠다. 모든 사건과 관심이 피해자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하고 확산됐다.

13일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상담소)에서 <2004년에서 2024년으로: 밀양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삶에서, 피해자의 눈으로,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간담회가 진행됐다. 김혜정 상담소장은 간담회장을 채운 40여명의 기자·PD들에게 향후 기사 썸네일 등에 ‘피해자 등장’, ‘피해자 첫 발언’ 등을 앞세우면 피해자 참석 여부에만 관심이 모일 수 있으니 유의해달라고 요청하며 간담회를 시작했다.

20년 전과 지금 사건이 왜곡되어 확산되는 중심에 언론이 있다. 피해자를 최초로 상담한 김옥수 전 울산생명의전화 가정·성폭력상담소장은 “(신고 당시) 어떤 언론사는 피해자의 육성을 변조하지 않고 그대로 방영해 피해자가 밖을 나갈 수도 없었다”며 “피해자는 수사과정에 이어 언론으로 인한 2차 피해까지 당해야 했다. 각 언론사에 항의했으나 정정보도를 올리고 사과한 곳은 CBS 뿐이었다”고 했다.

▲ 성폭력 사건 발생 당시 피해자를 최초로 상담했던 김옥수 전 울산생명의전화 가정·성폭력상담소장이 13일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윤유경 기자.
▲ 성폭력 사건 발생 당시 피해자를 최초로 상담했던 김옥수 전 울산생명의전화 가정·성폭력상담소장이 13일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윤유경 기자.

실제 사건 피해자는 상담소를 통해 ‘당시엔 중학생이어서 어떻게 보도되는지 등에 대해 실시간으로 확인하지 못했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다 보고 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말인지, 우리를 이용하는 것인지 다 느끼고 생각한다. 이것들이 무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피해자 자매는 서면 입장문에서 “잠깐 반짝하고 피해자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며 “경찰, 검찰에게 2차 가해를 겪는 또다른 피해자가 두 번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동시에 “잘못된 정보와 알 수 없는 사람이 잘못 공개돼 2차 피해가 절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근엔 주요 플랫폼으로 떠오른 유튜브로 2차 가해 영역이 확장됐다. 김혜정 소장은 “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일방적으로 확산하고, 피해자가 동의할 수 없는 내용과 방식으로 재현하는 문제는 2004년 방송사와 경찰의 문제에서 2024년 유튜버의 문제로 바뀌며 반복되고 있다”며 “유튜버들에겐 가해자들을 응징하겠다는 것이 도전적인 프로그램처럼 콘텐츠화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성폭력 피해자의 ‘일상에서 평온할 권리’는 ‘국민의 알권리’에 우선하는 생존권”이라고 강조했다.

간담회 당일에도 피해자 음성을 변조하지 않은 영상을 올렸던 유튜버(판슥)가 새로운 피해자 관련 영상을 올렸다. 피해자는 이 영상 삭제를 원하고 있다. 김 소장은 “피해자가 지난해 11월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내용인데, 이는 ‘고민 상담을 해줍니다’라는 공지를 보고 고민 상담을 하려 연락한 것”이라며 “공론화를 바란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전혀 안 했고, 본인을 인증하라 해서 판결문 등을 보냈지만 다 지워달라고 이야기했다”고 설명하며 재차 영상 삭제를 요구했다.

▲ 2024년 6월5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 2024년 6월5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유튜브 ‘나락보관소’가 2004년 밀양 성폭력 사건 피해자(가족)의 동의를 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라면서 배포한 보도자료 이미지

“경찰 신문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2차피해 발생”

밀양 성폭력 사건에선 경찰과 검찰의 수사 방식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김옥수 전 소장은 “수사과정 중 피해자가 겪을 수 있는 모든 2차피해가 발생했다”며 “경찰의 성인지 의식 부족과 성폭력 피해자심리에 대한 이해 부족, 미숙한 수사기법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경찰은 성폭력이 발생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피해자를 탓하는 비난성 질문을 했다. 피해자와 44명의 가해자들을 한 공간에서 대질신문했다. 김 전 소장은 “(경찰이) 피해자로 하여금 가해자들 앞에서 ‘누가 언제 강간했는지, 추행을 한 자는 누구인지’ 등을 특정하면서 진술하게 했다”며 “가해자 보호자들은 피해자와 가족들이 지나갈 때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피해자를 위축시켰다”고 했다. 

가해자 44명 중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다. 검찰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44명 중 10명만 기소하고 20명은 소년부로 송치했다. 나머지 13명은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친권자인 피해자 아버지와 합의했다는 이유로, 1명은 타 형사 사건으로 입건돼 모두 ‘공소권 없음’ 처리됐다. 재판부는 기소된 10명을 소년부로 송치했다. 소년부로 보내진 30명 모두 전과가 남지 않는 소년보호처분을 받았다.

▲ 2004년부터 현재까지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지원하고 있는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오른쪽)가 13일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윤유경 기자.
▲ 2004년부터 현재까지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지원하고 있는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오른쪽)가 13일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윤유경 기자.

피해자 지원의 가장 큰 목표는 ‘피해자의 일상회복’

밀양 사건 이후 20년이 남긴 최우선 과제는 피해자의 일상 회복이다. 피해자는 ‘살기 위해’ 밀양을 떠났다. 사건 신고 후 그는 “밀양 물을 흐려놨다(경찰)”, “피고인들이 충동적·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이고, 합의가 되었으며 피해자는 평온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재판부)”, “신고하고 잘사나 보자. 밤길 조심해라(가해자 가족들)” 등의 막말을 들어야 했다. 어렵게 전학한 고등학교에 탄원서를 써달라는 가해자 부모가 찾아와 학교도 그만뒀다.

이미경 상담소 이사는 “학교폭력 대응체계가 울산 뿐 아니라 전국에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학교, 교육청에서라도 적절한 처분을 내렸어야 했다”며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작은 문제라도 한번 더 짚어보고 사회적 지원 체계를 먼저 만드는 국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혜정 소장은 “피해자 의료비 지원 제도는 기간과 비용이 한정돼있다”며 “법률 소송에 쓸 수 있는 비용의 한도도 명확하다”는 어려움을 짚었다. 그는 “주거 지원도 LH에서 성폭력 피해자, 가정폭력 피해자가 신청할 수 있게 돼있지만 지역에 따라 굉장히 얻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며 “대안적 주거 관련 지원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울산을 비롯한 전국 경찰서에 ‘진술녹화실’이 생기고, 울산에 원스탑지원센터(해바라기센터 전신),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등이 설립됐다. 김 소장은 “여성폭력피해자들의 희생 위에 조금씩 지원체계가 잡혀나가는 것이 보여 여전히 안타깝다”고 말했다.

▲ 2004년부터 현재까지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지원하고 있는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가 13일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윤유경 기자.
▲ 2004년부터 현재까지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지원하고 있는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가 13일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윤유경 기자.

상담소는 이날부터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위한 온라인 모금에 나섰다. 후원금 전액은 피해자 생계비로 사용한다는 계획이다. 김 소장은 “이런 걸음이 일부 사람들의 동정이나 비난에 좌초되지 않고 사회적 연대의 힘으로 지속되기를 기대한다”며 “가해자에 대한 응징이나 처벌도 중요하겠으나 피해자에 대한 단단한 지지와 지원이 더 연구되고 논의되길 바란다”고 했다. 나아가 “여성폭력피해자 지원예산이 증액되고 피해자 일상회복이 단단해지고, 피해자 목소리가 힘있게 울릴 때 가해자에 대한 처벌 역시 정의로운 방법과 과정으로 심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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