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무덤

마을
전남 강진의 구상마을 무덤 / 출처 : 모닝와이드

전남 강진의 한 마을에는 논 가운데에 거대한 무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작천면 구상마을과 척동마을 사이에 있는 높이 2.5m, 둘레 20m의 커다란 무덤인데요.
묘 앞에는 “양건당애마지총兩蹇堂愛馬之塚”이라고 적힌 비석이 있습니다.
묘의 크기는 어마어마해서 사람이 옆에 서 있으면 더욱 거대하게 느껴지는데요.

논밭에 있는 무덤은 마을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주민들도 오래전부터 무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는데요.

마을 이장은 “무덤 높이가 사람 키의 두 배 정도 되죠. 보통 3~4m 정도 된다”라며 “옛날 조상님 때부터 있던 걸로 알고 있다. 저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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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모닝와이드

실제로 마주한 무덤의 크기는 엄청났는데요. 심지어 비석의 크기도 사람보다 훨씬 컸습니다.
일반 크기의 무덤에 비해 약 20배 이상의 차이를 보였는데요.
주민들은 거대한 무덤을 보고 막연히 왕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죠.
하지만 왕릉은 대부분 둥글게 생겼지만, 논의 무덤은 옆으로 퍼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습니다.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교수는 “논 한가운데에 묘를 만들고 묘의 크기가 보통 일반 서민들의 크기 이상으로 거의 왕릉의 크기만큼 큰 무덤이 있다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죠”라고 말했죠.

주민들은 논밭에 있는 무덤 때문에 농사가 잘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 주민은 “물 빠짐이 좋고 물 좋고 병충해도 없고 30년째 농사 피해가 없어요. 무덤이 있어서”라고 전했죠.

② 사람 아닌 말 무덤으로 밝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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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모닝와이드

척동마을에 있는 무덤은 사람이 아닌 말 무덤으로 밝혀졌습니다.
실제로 비석에는 말 모양이 새겨져 있었죠.
이 무덤은 임진왜란 때 전투에 참여했던 황대중 장군의 말 무덤입니다.

황 장군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약했습니다.
황 장군은 남원성 전투에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습니다.
말은 황 장군의 주검을 등에 실어주자, 시신을 업고 남원에서 강진까지 걸어 왔는데요.
말은 황대중 장군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고개만 떨구고 있다가 얼마 뒤 숨을 거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말의 충성심에 감탄하여 장군의 무덤 인근에 말 무덤을 만들게 됐죠.
황 장군이 숨진 지 200년이 지난 1795년, 마을에는 황 장군의 충효를 기리는 정려각이 세워졌습니다.
양건당충효정려각은 군지정 문화재로 지정돼 있죠.

출처 : 모닝와이드

말 무덤은 해마다 자손들이 관리하고 있는데요. 400년 이상 말 무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척동, 구상, 풍동마을에는 황대중 장군의 후손들이 5명 정도 남아있는데요.
2명을 고령에 거동이 힘들어 남은 3명이 말 무덤을 지금까지 관리하고 있죠.

한 달에 한 번씩 말 무덤에 찾아와 벌초를 진행할 정도로 정성껏 관리하고 있습니다.
후손들은 말 무덤을 도 지정 문화재로 승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해당 소식에 누리꾼은 “저희 시골 근처에 말 무덤 있는 곳이 여러 곳 있는데 실제로 저렇게 큰 무덤은 처음 봅니다”, “사람은 배신해도 동물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군요”, “우리가 모르는 영웅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말이 엄청나게 똑똑함 혼자 평소에 다니던 길로 집까지 충분히 돌아갈 수 있음. 주인과의 유대감이 깊다면 있을 수 있는 일” 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③ 파주에서도 볼 수 있는 의마총

출처 : pajucc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과 양주시 광적면을 잇는 발랑저수지 인근에는 연안 이씨 종중의 묘역 내 ‘의마총’이 있습니다.
이곳은 2019년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요.
그동안 의마총은 안내판도 없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종중 측이 보존하며 관리해 왔습니다.

의마총은 ‘의롭고 충성스러운 말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400년 전 조성된 말 무덤입니다.
의마총은 조선시대 왕이 직접 이름을 하사한 유일한 말 무덤으로 알려졌는데요.
이유길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따라 무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말은 이 장군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죽음을 알리는 ‘(음력)3월 4일 죽다’라는 뜻의 글을 자신의 삼베적삼 옷자락에 핏물로 적어 말의 안장에 매어줬는데요.
말을 채찍질해 집으로 돌려보내자, 말은 사흘을 달려 집에 도착해 이 장군의 죽음을 알리고 숨을 거뒀습니다.

조선 광해군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이유길 장군에게 병조참판 직을 내렸고, 말의 무덤을 의마총이라 부르게 했죠.
의마총 옆에는 이유길 장군의 무덤이 조성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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